한국재난안전뉴스 박종열 기자 |
2022년 1월 27일, 대한민국 산업사에 획을 긋는 거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사람의 생명이 경영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명제를 법전에 새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날이다. 노동계는 산업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며 환호했지만, 경영계는 세계 어디에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영책임자 직접 처벌’이라는 조항 앞에 공포를 느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이 법이 가져온 빛과 그림자를 5회에 걸쳐 진단한다. [편집자 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자 법 제정 단계부터 기업을 망하게 한다며 극렬하게 반대해온 대기업들은 앞다투어 안전 예산 증액과 ‘스마트 안전’ 도입을 선언했다.
수천억 원을 들여 통합 관제 센터를 짓고, 인공지능(AI) 카메라가 근로자의 안전모 착용 여부를 감시하고, 센서가 가스 누출을 탐지하며, 메타버스 공간에서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 뒤에 숨겨진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사뭇 다르다. “본사에서 내려오는 안전 지침은 늘었지만, 작업은 그대로”라는 냉소적인 말들이 들려왔다.
경기 부천시 D건설업체의 아파트 신축현장에서 3년째 공사감독을 보조하는 일을 하는 성모씨(45)는 “본사에서는 모니터링 수치만 보고 독촉하지만, 정작 현장의 고질적인 2인 1조 작업 미준수나 살인적인 공기 단축 압박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안전 의무는 강화되었지만 적정 공기나 공정 속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빠진 채, 현장 근로자들에게만 수많은 안전 수칙 준수를 강요하는 구조적 모순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노동 현장을 보면 중대재해처벌법 최대의 수혜자는 노동자도, 기업도 아닌 대형 로펌이라는 냉소적 평가가 나오는 게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자본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사고 예방을 위한 기술적 투자보다는 사고 발생 시 ‘경영책임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법리 구축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법 시행 전후로 서초동과 광화문의 대형 로펌들은 ‘중대재해 대응팀’을 신설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어 시나리오를 작성해주고 수억 원대의 컨설팅 비용을 받고 있다.
정작 그 예산이 현장 노동자의 노후된 크레인을 교체하거나 추락 방지망을 보강하는 데 쓰였다면 안전사고가 좀 더 줄었을지도 모른다. 이 법이 태생적으로 지닌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충분히 예견됐던 현상이다.
익명을 요구한 A건설업체 기획실 B상무는 “사고 발생 시 수사 대응 시나리오를 짜고, 서류상의 허점을 보완하는 데만 수십억 원을 썼다”며 “대기업 입장에서는 오너를 보호하는 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경영전략일 수밖에 없다. 회장님이 감옥에 가면 모든 사업플랜이 중단되는데, 다른 대기업들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법 시행 이후 대기업 내에서 가장 중요한 보직 중 하나는 CSO(최고안전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위상은 극과 극이다. 진정으로 안전을 위해 예산과 인사권을 행사하는 기업이 있는 반면, 극단적으로는 사고 시 CEO 대신 ‘책임을 질 방패’로 퇴직을 앞둔 임원을 임명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많은 대기업이 CEO 대신 법적 책임을 질 CSO 자리를 신설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법원은 최근 판결에서 “단순히 CSO를 임명했다고 해서 CEO의 실질적 지배권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고 있다. 실질적인 결정권과 예산권을 CEO가 쥐고 있다면 CEO의 처벌은 피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기업이 여전히 다양한 조직개편을 통해 CSO를 ‘꼬리 자르기용’ 보직으로 활용한다는 의구심을 사고 있다. 이는 조직 내 안전 문화를 왜곡시키고 책임 경영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기업의 일감은 하청업체로 내려가고 안전 사고는 하청업체에서 많이 발생한다.
이 법 시행 이후 원청은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하청업체에 불가능에 가까운 안전 서류 이행을 요구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계약 해지 등의 불이익을 주는 사례가 많아졌다.
그러면 하청업체는 일감을 잃지 않기 위해 현장 점검보다는 서류 조작에 매달리게 된다. ‘위험의 외주화’가 ‘서류의 외주화’와 결합해 악순환하고 있는 셈이다.
대기업의 안전 역량은 하청업체로 흘러 내려가야 한다. 하청업체의 안전 설비 투자를 원청이 지원하거나 안전 관리 인력을 파견하는 ‘안전 상생 모델’이 정착되어야 한다.
안전을 위해 공기가 연장될 경우 원청이 그 손실을 보전해주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한다. 안전은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공급망 전체의 공동 가치가 되어야 한다. ‘안전은 비용이 아닌 공유 가치’라는 인식의 전환이 대기업 경영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대한민국 산업 현장의 고질적인 ‘위험의 외주화’를 끊어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