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박종열 기자 |
2022년 1월 27일, 대한민국 산업사에 획을 긋는 거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사람의 생명이 경영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명제를 법전에 새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날이다. 노동계는 산업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며 환호했지만, 경영계는 세계 어디에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영책임자 직접 처벌’이라는 조항 앞에 공포를 느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이 법이 가져온 빛과 그림자를 5회에 걸쳐 진단한다. [편집자 주]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법)은 단순히 사고를 낸 실무자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 기업의 정점에 있는 경영책임자에게 직접적인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선언이었다. 산업 안전의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노동계는 노동자의 안전을 보호할 최후의 보루라며 환호했다. 산업계는 ‘공포 경영의 서막’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지난 4년간 노동현장과 경영자의 철학은 과연 바뀌었을까. 바뀌었다면 무엇이 변화했을까.
◇통계가 말하는 불편한 진실
법 시행 이후 4년간의 통계를 살펴보면 ‘통계의 역설’이 관찰된다. 고용노동부의 2025년 결산 자료에 따르면, 산업 재해 사망자 수는 법 시행 초기에는 시행 전인 2021년 대비 상당히 감소했으나, 2024년 이후에는 500명대 중반에서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당초 목표했던 OECD 평균 수준(만인율 0.29) 달성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25년 하반기에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의 사망사고가 전년 대비 오히려 10% 이상 늘어난 기현상이 발생했다.
특히 대기업 사업장의 사고는 줄어든 반면, 50인 미만 영세 사업장과 건설 현장의 소규모 재해는 오히려 빈도가 높아지는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졌다.
이는 강력한 처벌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산업 구조의 밑바닥까지 안전망이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법은 강화됐지만, 현장의 위험은 법망을 비웃듯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특히 건설업의 추락 사고와 제조업의 끼임 사고 등 이른바 ‘재래형 재해’는 전체 사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는 단순히 법으로 경영자를 압박하는 것만으로는 현장의 고착화된 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법부의 판단: ‘문서’가 아닌 ‘실천’의 증명을 요구
지난 4년간 사법부는 경영책임자들에게 잇따라 유죄 판결을 내리며 법적 기준을 확립해 왔다. 법원은 경영책임자 수십 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판결은 주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미흡’에 초점이 맞춰졌다. 법원은 경영책임자가 단순히 안전관리자를 선임하고 매뉴얼을 벽에 비치한 것만으로는 의무를 다했다고 보지 않았다.
“현장의 위험 요인을 보고받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예산 집행과 인력 배치가 이루어졌는가”가 유무죄를 가르는 핵심 쟁점이 되었다.
“안전 시스템을 문서로만 갖춰놓고 실질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는 법원의 엄중한 판단은 기업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 “몰랐다”는 변명은 법정에서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안전에 있어서 ‘실천’과 ‘실천 의지’가 중요하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특히 2025년 내려진 대법원 판례는 경영책임자의 ‘묵인’이나 ‘부작위’(不作爲, 어떤 행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이를 하지 않는 것)도 처벌 대상임을 명시해 기업들에게 다시 한번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사고 예방보다는 ‘수사 대응용 서류 만들기’에 더 많은 행정력을 낭비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기업의 대응: ‘안전 투자’와 ‘법적 방어’ 사이의 줄타기
법 시행 이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안전 예산이 연평균 20% 이상 증가한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 예산의 ‘질’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상당수 기업이 실질적인 설비 노후화 개선이나 위험 공정 자동화에 예산을 쏟기보다는 로펌 자문비, 수사 대응 매뉴얼 제작, CSO(최고안전책임자) 영입 등 ‘법적 리스크 관리’에 예산을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다.
“본사에서 내려오는 서류 작업은 늘었지만, 정작 현장의 위험한 기계는 그대로 돌아간다”라는 한 현장 근로자의 말이 현실을 말해준다.
◇남겨진 쟁점: 예방인가 처벌인가
중대재해법은 우리 사회에 ‘안전은 경영의 핵심’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처벌에만 매몰된 현재의 구조는 기업들로 하여금 ‘안전’이 아닌 ‘회피’를 공부하게 만들고 있다.
법률 전문가들은 중대재해법이 가진 ‘모호성’을 큰 문제로 지적한다. 무엇이 ‘충분한 예산’이고 무엇이 ‘실질적 지배’인지에 대한 법적 기준이 여전히 판례에 의존하고 있어, 기업들은 불안 속에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법이 사고 예방보다는 사고 후 처벌을 막기 위한 ‘서류 작업’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비판 또한 끊이지 않는다. 기업들이 안전 전문 인력을 채용하는 대신 대형 로펌의 법률 컨설팅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법의 집행을 넘어, 기업이 자발적으로 안전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 제도와 결합한 법적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생명을 지키는 법이 기업의 경영 의지까지 꺾어서는 안 되며, 처벌을 위한 법이 아닌 예방을 위한 가이드로서의 기능을 강화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안전’의 본질이 기술적 예방이 아닌 ‘법적 방어막’ 구축으로 변질됐다는 우려 속에서, 중대재해법은 전환점에 서 있다












